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창 폭동 (문단 편집) === [[코민테른]]의 저지 === 그런데 7월 23일 코민테른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와 하인츠 노이만이 도착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무장봉기를 조직하라고 지시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공산당의 순수한 무장봉기가 아니라 국민당 내부의 좌익을 선동하여 국민당 최고 지도부에게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오직 국민당의 혁명적 변혁이 전혀 희망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거나, 이러한 실패가 새롭고 심각한 혁명 고조와 동시에 일어난다면" 그때서야 소비에트 수립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코민테른과 크렘린의 방침이었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에서는 국민당 혁명위원회, 좌파 국민당이라는 틀 안에서 행동할 것을 계속 주문했다. 여기에서 기록이 엇갈리는데, 중국 공산당에서는 7월 25일 코민테른이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계획이 가능하다고 본다'라고 전보를 보낸 점을 들어 당시 [[중공중앙]]이 봉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다른 회고를 내놓고 있다. 장궈타오의 회고에 따르면, 7월 26일 한커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 상무위원회가 소집되어 [[장궈타오]], [[취추바이]], [[리웨이한]], [[장타이레이]], 로미나제 등이 참석했다. 소련군 고문 [[바실리 블류헤르]]는 [[장파쿠이]]가 자신의 휘하의 제4군, 제1군, 제20군 등을 난창-남심에서 광저우로 철수할 것으로 밝혔다고 장파쿠이에게 지접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난창에서 봉기하는 것보다는 장파쿠이와 함께 광동으로 철수하는 편이 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난창에서 봉기해봐야 봉기에 참여할 병사는 5~8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우세한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동강까지 진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로미나제가 소련인 고문이 난창 폭동에 참여하는 것과 코민테른 자금이 난창 폭동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훈령이 내려왔다고 밝혔다. 결국 7월 26일의 회의는 난창 폭동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당중앙은 장궈타오를 파견하여 난창에서의 봉기를 저지하려 했다. 장궈타오는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의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찬성한 것을 지금 지시를 받고 중지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7월 30일 새벽, 장궈타오가 난창에 도착했다. 원래 봉기는 7월 31일[* 중국 공산당 역사에 따르면 7월 30일.]로 잡혀 있었지만, 장궈타오가 난데없이 가져온 중지 명령에 전선위원회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했다. 평소에 과묵하고 온건하던 제4군 총참모 윈다이잉조차 격한 반응을 보였다. >"코민테른과 중공 중앙은 중국혁명을 짓눌렸고 몇천, 몇만의 동지들을 땅 속에 묻었다. 그들의 지도는 완전히 파탄되었다. 지금 난창 폭동은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이제 와서 코민테른의 지시라고 하여 우리들의 행동을 저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맹세하고 반대한다. (중략)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킨다면 당신을 타도하겠다!" 저우언라이 역시 격노했다. >"이 명령은 중앙이 나를 파견한 목적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 우리가 행동하지 못한다면 나는 사직할 수밖에 없다. 오늘 이 특별위원회에도 더 참석할 필요가 없다." 장궈타오의 만류로 폭동은 7월 31일에서 8월 1일로 늦춰졌고, 장궈타오는 우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돌아갈 여유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폭동에 참여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의 주장에 따르면, 장궈타오가 7월 30일 난창에 파견된 것은 코민테른과 중공중앙의 봉기에 대한 자신감을 전달한 것이며 봉기가 8월 1일로 늦춰진 것은 장궈타오가 장파쿠이와 합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